나치 독일 치하의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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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1938년 오스트리아의 독일 병합인 안슐루스 이후의 시기를 의미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사회민주당, 기독교 사회당, 대독일 인민당 등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 간의 경쟁과 독일과의 통합 문제에 직면했다. 1930년대 경제 위기 속에서 오스트리아 나치 세력은 지지세를 넓혔고, 1938년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병합되었다. 병합 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마르크"로 불리며 정치적 반대파, 유대인, 로마인 등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고,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희생자 이론"을 내세워 나치 독일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1980년대 이후 과거사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오스트리아는 나치 범죄에 대한 공동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이론"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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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치하의 오스트리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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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오스트리아국 (1938–1940) |
상태 |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
수도 | 대빈 (사실상) |
공용어 | 독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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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독일의 노래 (1절만 사용) |
정치 | |
정치 체제 |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
국가판무관 | 요제프 뷔르켈 (1938–1940) |
국가대리관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1938–1939) |
역사 | |
이전 국가 | 오스트리아 연방국 |
주요 사건 | 안슐루스 (1938년 3월 13일) |
멸망 | 독립 선언 (1945년 4월 27일) |
이후 | 독일로부터 독립 (1945년 5월 8일) |
경제 | |
통화 | 라이히스마르크 (ℛℳ) |
기타 | |
인구 | 오스트리아인 |
2. 초기 역사
오스트리아에서 국가사회주의의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2] 앤드류 글래딩 화이트사이드 교수는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가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독일-체코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독일 나치즘의 전조라는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폐지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AP), 기독교 사회당(CS), 그리고 1920년 대독일 인민당(Großdeutsche Volkspartei, GVP)으로 이름이 바뀐 민족주의 대독일 연합(Großdeutsche Vereinigung) 등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이 경쟁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공산당(KPÖ)과 오스트리아 국가 사회주의자(Deutsche National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NSAP) 같은 소규모 정당들은 제국 의회(Reichsrat)나 오스트리아 국민의회(Nationalrat)에 참여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대독일 인민당,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독일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을 지지했다. 기독교 사회당 또한 통합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군주제 유지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분열되었다. 오스트리아 공산당만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합병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군주주의자들은 원래 합병에 반대했으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실패하고 독일이 보수 정부를 갖게 된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카를 레너가 1919년 9월 10일에 서명한 생제르맹 조약은 독일과의 모든 통합을 금지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며,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명확히 규정했다.[7]
2.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국가사회주의의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2] 앤드류 글래딩 화이트사이드 교수는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가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독일-체코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독일 나치즘의 전조라는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다민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폐지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AP), 기독교 사회당(CS), 그리고 1920년 대독일 인민당(''Großdeutsche Volkspartei'', GVP)으로 이름이 바뀐 민족주의 대독일 연합(''Großdeutsche Vereinigung'') 등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이 경쟁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공산당(''Kommunistische Partei Österreichs'', KPÖ)과 오스트리아 국가 사회주의자(''Deutsche National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NSAP) 같은 소규모 정당들은 제국 의회(Reichsrat)나 오스트리아 국민의회(Nationalrat)에 참여하지 못했다.
SDAP, GVP, DNSAP는 각기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독일 오스트리아와 당시 공화국이었던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의 통합을 지지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폐지되면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7]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AP), 기독교 사회당(CS), 대독일 인민당(GVP) 등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이 경쟁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독일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을 지지했다.당시 오스트리아 공산당(KPÖ)과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DNSAP)은 제국의회나 국민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3.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폐지되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AP), 기독교 사회당(CS), 대독일 인민당(GVP) 등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경쟁했다. 오스트리아 공산당(KPÖ)과 오스트리아 국가 사회주의자(DNSAP) 등 소규모 정당들은 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7]
SDAP, GVP, DNSAP는 각기 다른 이유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합을 지지했다. CS는 통합에 찬성했지만, 군주제 유지 문제로 분열되었다. KPÖ는 합병에 반대했고, 군주주의자들은 초기에는 반대했으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실패 후 찬성으로 돌아섰다. 초대 총리 카를 레너가 서명한 생제르맹 조약은 독일과의 통합을 금지하고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규정했다.[7]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 초기에는 경제 문제, 하이퍼인플레이션, 정치적 긴장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1920년까지 사회민주당이 정부를 이끌었고, 이후 기독교 사회당이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았다.
1922년 이그나츠 자이펠 총리는 경제 상황을 개선했지만, 반공주의 입장을 취하며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양측은 이를 계급 갈등으로 보았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3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경찰은 장비가 부족했다. 1918년부터 ''Kärntner Abwehrkampf''와 같은 향토 방위대가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Heimwehr''가 조직되었다. 준군사 조직의 등장과 정치적 폭력이 증가했다.
독일 노동자당은 1903년 보헤미아에서 창설되어 독일 민족주의와 반성직주의를 지지했다. 1918년 발터 리엘이 당을 이끌며 이름을 DNSAP로 변경했다. 1920년부터 오스트리아 당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과 협력했다. 1926년 빈에서 히틀러의 독일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오스트리아 지부가 설립되었다.
1927년 총선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는 779표를 얻는 데 그쳤다. 1930년 총선에서는 사회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기독교 사회당은 소수 정당과 연립 정부를 유지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는 3.6%의 득표율로 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1930년대 이후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나치는 실업 문제와 유대인을 연결 짓는 선동을 통해 지지세를 확장했다.
4. 오스트리아 파시즘과 나치즘의 성장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심각한 경제 문제, 하이퍼인플레이션, 그리고 다양한 정치 그룹 간의 끊임없는 긴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2년 이그나츠 자이펠 추기경이 총리에 취임하여 경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반공주의자로서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8]
오스트리아 군대는 연합국에 의해 30,000명으로 제한되었고, 경찰은 장비가 부족했다. 1918년에 최초의 향토 방위대가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리하르트 슈타이들의 지휘 하에 바이에른 조직의 도움을 받아 티롤에서 최초의 향토방위대(Heimwehr)가 창설되었다. 곧 다른 주들도 뒤따랐다. 1923년 왕정주의자 "오스타라" 회원들이 노동자를 사살했고,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자체 보호 조직을 설립했다. 전직 현역 군인과 로마 가톨릭 교회 회원들로 구성된 다른 준군사 조직도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Vaterländische Schutzbund''(조국 보호자)를 결성하고 나중에 오스트리아 돌격대(SA)를 시작했다.
독일 노동자당은 1903년 보헤미아에서 창설되었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반성직주의를 지지했다. 1909년 변호사 발터 리엘이 당에 가입했고 1918년에 지도자가 되었다. 당명은 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Deutsche National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NSAP)으로 변경되었다. 군주제 몰락 후, 당은 체코슬로바키아 당과 오스트리아 당으로 분열되었다. 1920년부터 오스트리아 당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었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과 협력했다. 1926년 빈에서 히틀러의 독일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오스트리아 지부가 설립되었다.
1930년 총선에서 사회 민주당이 가장 큰 단일 정당이었고, 기독교 사회당은 소규모 정당과의 연립 정부를 유지했다. 히틀러의 NSDAP와 연결된 오스트리아 국가 사회주의자는 투표의 3.6%만을 얻어 국회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나치는 독일과의 통일을 원했던 다양한 독일 민족 그룹을 희생하여 표를 얻었다. 1930년 이후 히틀러의 NSDAP는 경제 위기로 인해 매년 회원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
기독 사회당은 1932년부터 집권했으며,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총리를 맡았다. 돌푸스는 권위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교황의 회칙인 노동 신조(Rerum novarum) (1891)와 사십 년(Quadragesimo anno) (1931)에 기초하여 의원 내각제를 폐지하고자 했다. 1933년 5월 4일 오스트리아 의회의 위기는 돌푸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1933년 5월 말, 기독 사회 연합은 조국 전선으로 개편되었다. 조국 전선은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며 격렬하게 반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 조직이었다. 일주일 만에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금지되었고, 그 달 말까지 공화주의 준군사 조직과 자유사상 단체가 금지되었다. 나치는 츠베틀과 인스브루크에서 40% 이상을 득표하며 선동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나치 지지자들은 테러를 일으켜 6월 초에 4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당했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1933년 초에 총리가 되었다. 사회 민주당은 독일과의 협력 의사를 당 강령에서 삭제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당이 금지된 후 나치는 바이에른으로 도망쳐 오스트리아 군단을 설립했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테러리스트들은 독일로부터 재정적, 물류적,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독일 정부는 오스트리아를 조직적인 선동에 시달리게 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크렘스에서 수류탄 공격이 있은 후 6월에 금지되었다.
1934년 2월 12일 린츠에서 폭력적인 대결이 있었다. 경찰과 준군사 단체는 사회 민주당 소유의 건물이나 당원의 집에 들어가 금지된 사회 민주당 준군사 조직의 무기를 찾으려 했다. 폭력은 전국으로 퍼져 내전으로 발전했다. 2월 14일까지 경찰, 준군사 지지자, 군대는 대결에서 승리했다. 많은 체포가 이루어졌고, 헌법 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노동 조합과 사회 민주당은 금지되었고, 사형이 부활되었다. 정치적 반대가 진압된 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오스트리아 파시스트의 ''슈텐데스타트''로 변모했다. 권위주의적인 ''5월 헌법''(Maiverfassung)이 5월 1일에 선포되었다.
4. 1. 나치 쿠데타 시도와 독일의 영향력 확대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나치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살해되었다.[8] 쿠르트 슈슈니크가 총리직을 이어받아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독일의 압력은 계속되었다. 1936년 7월 협정으로 투옥되었던 나치 당원들이 석방되고 일부 나치 신문 발행이 허용되었으며, 나치 동조자들이 정부 요직에 임명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주장했고, 1937년부터 오스트리아 병합 계획을 구체화했다. 1938년 2월, 히틀러는 슈슈니크에게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활동 자유화와 나치 인사의 내각 참여를 강요했다.5. 안슐루스 (오스트리아 병합)
1938년 3월 13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의도가 처음에는 없었으나, 진주(오토 작전)로 열렬한 환영을 받자 즉시 양국 통합으로 방침을 전환했다.[2] 같은 날, 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 사임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총리는 1934년 연방 수권법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재통일에 관한 법률"을 결의하고 발포했다.[2] 이 법률은 헌법 위반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제1 공화국의 통합과 오스트리아가 독일국의 "주"가 되는 것이 합법화되었다.[2] 같은 날, 독일에서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재통일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주가 되고, 4월 10일에 국민 투표를 실시하는 것이 정해졌다.[2]
성립된 "오스트리아 주"는 오스트리아 국가 청산을 주된 업무로 하며, 1939년 9월 30일에 청산을 완료하고 제국 대관구로 재편될 예정이었다.[2] 3월 15일에는 연방 정부를 대신하여 4명의 대신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주 정부가 성립되었다. 또한 제국 총독(국가 대리관)이 설치되었고,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총독으로 취임했다.[2] 한편, 통합에 관한 조치를 행하는 독일 중앙 정부 측에서도 여러 관청의 권한이 경합했다. 처음에는 내무성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재통일 실시를 위한 본국"이 통합 업무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4월 23일에 오스트리아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리더인 요제프 뷔르켈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재통일을 위한 제국 전권 위원"(국가 변무관)으로 임명되었다.[2] 뷔르켈은 총통에 직속되어, 총독이나 주 정부에 대해서도 명령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
오스트리아 주는 법제상으로도 오스트리아 주(Land Österreichde)로 정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오스트마르크(Ostmarkde)"라고 호칭되었다.[2]
합병을 비준하기 위한 국민투표는 4월 10일로 예정되었으며,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이 그에 앞서 진행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과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를 비롯한 나치 정권의 많은 지도자들이 연설을 했다. 통제된 언론과 라디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재통합"에 대한 찬성 투표를 캠페인했다. 테오도어 이니처 추기경과 같은 저명한 오스트리아인들은 "Heil Hitler"가 적힌 주교 선언문에 서명했고, 사회 민주당원 카를 레너는 찬성을 촉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주교들은 안슐루스(합병)를 지지했으며,[2] 나치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국민투표 전날, 오스트리아의 모든 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하며 종을 울렸다.[2]
공식 기록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에서는 99.73%, 독일에서는 99.08%가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민투표에서 제외된 오스트리아 유권자는 약 8%에 달했다. 즉 유대인 약 20만 명, 혼혈(유대인과 "아리아인" 부모를 모두 둔 사람들) 약 17만 7천 명, 그리고 "인종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이미 체포된 모든 사람들이 제외되었다.
6. 나치 독일 치하의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마르크(Ostmarkde)"로 불렸으며, 나치 독일의 강제적 동일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오스트로파시즘 시대의 지배 정당 조국 전선은 분쇄되었고, 각 시민·농민 단체도 해체되었다.[2] 유대인, 로마인, 보수적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정치적 반대파들이 탄압받았다.[2]
오스트리아 가톨릭 교회는 초기에는 나치 체제에 순응하는 듯했으나, 나치당은 가톨릭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고, 종교적 자유를 제한했다.[2]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주(州)가 되었고, 독일 중앙 정부의 여러 관청들이 통합 업무를 담당했다. 1938년 4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리더인 요제프 뷔르켈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재통일을 위한 국가 변무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 주 정부에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2] 오스트리아 주둔 독일 총독에게 각 권한이 위임되는 형태로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국내법은 점차 독일 본국의 법률로 대체되었다.[2]
안슐루스 이전,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군사 조직인 오스트리아 친위대는 테러 조직이었다. 안슐루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및 독일군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전쟁 중, 80만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국방군(Wehrmacht)에 자원했으며, 15만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무장 친위대(Waffen-SS)에 입대했다.[2]
아돌프 히틀러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의도가 없었으나, 1938년 3월 13일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주(오토 작전)에 대한 열렬한 환영을 보고 즉시 양국 통합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같은 날, 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 사임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아르투어 자이서잉크바르트 총리는 1934년 연방 수권법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재통일에 관한 법률"을 결의하고 공포했다. 이 법률은 헌법 위반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제1 공화국의 통합과 오스트리아가 독일국의 "주"가 되는 것을 합법화했다.
6. 1. 오스트마르크 법과 제국 대관구
1939년 4월 14일, 오스트마르크 법이 공포되어 오스트리아 주는 폐지되었다.[30] 이 법은 5월 1일에 발효될 예정이었으나, 1940년 4월 1일까지 연기되었다.[30] 법 발효와 함께 오스트리아 주와 총독의 권한은 독일 정부와 7개의 제국 대관구로 이행되었다.[30]1940년에 오스트리아에 설치된 7개의 제국 대관구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오스트마르크 제국 대관구군이 만들어졌다. 1942년에는 도나우-알프스 제국 대관구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30] 각 제국 대관구는 나치당의 지역 조직인 대관구가 관리했으며, 대관구 지도자는 해당 지역의 행정 책임자였다.
각 제국 대관구와 역대 대관구 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제국 대관구 | 중심 도시 | 역대 대관구 지도자 |
---|---|---|
케른텐 제국 대관구 | 클라겐푸르트 | |
하도나우 제국 대관구 | Krems (Lower Austria)영어 | |
상도나우 제국 대관구 | 린츠 | |
잘츠부르크 제국 대관구 | 잘츠부르크 | |
슈타이어마르크 제국 대관구 | 그라츠 | |
티롤-포어아를베르크 제국 대관구 | 인스브루크 | |
대(大) 빈 제국 대관구 | 빈 |
6. 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전반기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빈은 여러 차례 연합군의 공습 목표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Bombing of Vienna in World War II|빈 공습영어). 1945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영토도 전장이 되어 1945년 5월까지 이어졌다.6. 3. 홀로코스트와 오스트리아인의 가담
오스트리아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자마자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이 발생했다. 국민 투표 다음 날, 한 영국 특파원은 10만 명의 비엔나 시민들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유대인 지구를 휩쓸고 다녔다고 추정했다.[2] 비엔나의 부유한 지역인 베링에서는 유대인 여성들에게 모피 코트를 입고 거리를 청소하도록 명령했고, 그들 위에 관리들이 소변을 보았으며,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 무리가 환호했다.[2]
아리아인화 과정은 즉시 시작되었으며, 1938년 3월 11일부터 8월 10일 사이에 약 1,700대의 자동차가 유대인 소유주로부터 압수되었다. 1939년 5월까지 정부는 유대인이 소유한 약 44,000채의 아파트를 압수했다. 많은 사람들은 상점과 아파트를 빼앗겼고, 그들을 약탈한 사람들이 SA와 광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이사했다. 유대인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붓을 들고 무릎을 꿇고 반 안슐루스 구호가 적힌 인도를 청소하도록 강요받았다.
1938년 11월의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 포그롬은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잔혹했다. 비엔나의 대부분의 유대교 회당은 대중 앞에서 소방서와 함께 불태워졌다.[1]
최종 해결책을 실행한 관료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2] 보스턴 대학교 프레데릭 S. 파디 국제학부의 국제 관계학 교수인 토마스 버거에 따르면, 최종 해결책에 관여한 사람들은 불균형적으로 오스트리아인이 많았다. 그는 "오스트리아는 제3제국 인구의 약 8%를 차지했지만, 친위대(SS)의 약 13%, 강제 수용소 인력의 약 40%, 그리고 강제 수용소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70%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고 말했다.[15] 터프츠 대학교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아트 역시 오스트리아인이 나치 독일 인구의 8%, 친위대의 13%,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 직원 중 40%를 차지했으며, 강제 수용소 지휘관의 75%가 오스트리아인이었다고 말한다.[16]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강제 수용소는 마우트하우젠-구센 단지였으며, 여기에는 50개 이상의 부속 수용소가 있었다. 그 중에는 에벤제 수용소, KZ – Nebenlager Bretstein, 슈타이어-뮌히홀츠 부속 수용소, AFA-Werke 등이 있었다. 대량 학살은 린츠 근처의 하르트하임 성에서 자행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살해 프로그램인 T4 작전(비자발적 안락사)이 있었고, 비엔나의 암 슈피겔그룬트 진료소에서는 700명 이상의 장애 아동이 살해되었다.
나치 정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주요 오스트리아인들은 다음과 같다.
- 아돌프 히틀러: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총리였으며, 1934년 8월 2일부터 1945년 4월 30일까지 "총통"(Führer)이었다.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1943년 1월 하이드리히를 대신하여 ''제국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의 수장이 되었다.
- 아르투어 자이세잉크바르트: 네덜란드에서 여러 나치 범죄를 조직하거나 은폐했다.
- 오딜로 글로보치니크: 1939년부터 폴란드에서 SS와 경찰 지도자였으며, 폴란드에서 4개의 나치 절멸 수용소인 벨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마이다네크의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약 20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살해한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 프란츠 요제프 후버: 빈, "저(下) 도나우", "상(上) 도나우" 지역의 ''보안경찰''(Sicherheitspolizei, SiPo)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상(上) 오스트리아의 ''가울라이터''였다.
- 알렉산더 뢰어: 공군 제4군의 사령관으로, 1941년 4월 베오그라드 폭격을 감행했다.
- 헤르만 노이바허: 여러 외교 직책을 맡았던 오스트리아의 나치 정치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그리스와 발칸 반도(세르비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를 위한 독일 외무부의 주요 관료로 임명되었다.
- 로타르 렌둘리치: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르마흐트의 군집 사령관이었다. 렌둘리치는 독일군에서 ''장군''(Generaloberst, 대장) 계급으로 승진한 세 명의 오스트리아인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두 명은 알렉산더 뢰어와 에르하르트 라우스였다.
- 볼프강 아벨: 베를린 대학교의 인종 생물학 교수였으며, 소위 ''라인란트 사생아''에 대한 강제 불임에 관여했다. 전쟁 중 그는 육군 최고 사령부를 대신하여 7,000명의 소련 전쟁 포로에 대한 "인종 분석"을 수행했다.
- 하인리히 그로스: "생명 가치 없는 생명"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썼고 암 슈피겔그룬트에서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치명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 아돌프 아이히만의 조수로 일한 오스트리아의 ''친위대''(SS) 장교였다.
- 카를 질버바우어: 1944년 안네 프랑크를 체포했다.
- 오토 스코르체니: 무장친위대(Waffen-SS)의 SS-Obersturmbannführer(중령)이었다.
- 에드문트 글라이제호르스테나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오스트리아 장교였으며, 1938년 ''안슐루스'' 직전 마지막 오스트리아 부총리였고, 나치 독일 베르마흐트에서 군사 역사가, 기록 보관인, 장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 오스트리아의 가울라이터 후고 유르, 프란츠 호퍼, 프리드리히 라이너 또한 나치 범죄에 참여했다.
- 프리드리히 프라넥: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르마흐트의 장군이었다.
- 아몬 괴트: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사령관이었다.
1934년 3월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전체에 19만 1481명, 그 중 빈에 17만 6034명의 유대인(유대교도)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안슐루스 직전에는 전체 18만 1882명(빈은 16만 7249명)으로 감소했다. 안슐루스 후에는 유대인 지도자 체포, 시나고그 파괴, 상점 보이콧 등 탄압이 진행되었다. 1938년 8월에는 유대인의 국외 퇴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파견되어, 매달 8000명의 유대인이 재산을 남겨둔 채 망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총 12만 8500명의 유대인이 국외로 망명했다. 이 중 2만 4500명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 여러 나라로 망명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침공해 온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직면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6만 5000명의 오스트리아 거주 유대인이 각지의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1945년 5월을 맞이한 빈의 유대인은 5512명에 불과했다.
7. 오스트리아 저항 운동
나치 독일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인구 중 일부는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17] 오스트리아 역사가 헬무트 콘라트는 1938년 오스트리아 인구 680만 명 중 약 10만 명이 정권에 반대하여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나치당 오스트리아 지부의 당원은 70만 명이었다고 추산했다.[18]
오스트리아 저항 단체들은 종종 이념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전쟁 전 정당들의 스펙트럼을 반영했다. 무장 저항 단체 외에도 강력한 공산주의 저항 단체, 가톨릭 교회에 가까운 단체, 합스부르크 단체, 그리고 독일 국방군 내의 개별 저항 단체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저항 단체는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되었고, 단원들은 처형되었다.
오스트리아 저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개인 단체는 사제 하인리히 마이어 주변의 단체였다. 이 매우 성공적인 가톨릭 저항 단체는 한편으로는 전쟁 후 합스부르크 군주제를 부활시키기를 원했고(윈스턴 처칠의 계획에 따라, 나중에 요제프 스탈린에 의해 반대됨), V-2 로켓, 타이거 전차, 그리고 항공기(메서슈미트 Bf 109, 메서슈미트 Me 163 코메트 등)의 계획과 생산 시설을 연합군에게 매우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생산 시설의 위치 스케치를 통해 연합군 폭격기는 정밀 공습을 수행하여 주거 지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다른 많은 독일 저항 단체와는 달리, 마이어 그룹은 아우슈비츠 근처 젬페리트 공장과의 접촉을 통해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해 매우 일찍 정보를 알렸다.[19][20][21][22][23]
오스트리아 저항의 징표는 O5였으며, 여기서 5는 E를, OE는 Österreich(외스터라이히)의 약자였다. 이 표시는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8. 전후 오스트리아
1945년 이후, 많은 기념비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에 세워졌지만, 나치 정권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는 훨씬 나중에 세워졌다.[1]
1984년, 전쟁이 끝난 지 প্রায় 40년이 지나 라켄바흐에서 "치고이네르-안할텔라거" 로마니를 위한 기념비가 공개되었다.[4] 케메텐에서는 전쟁 전 200명의 로마니족이 살았었지만, 1941년에 추방되었고 1945년에 단 5명만이 돌아왔다. 케메텐에는 아직 기념비 건립이 시작되지 않았다.[4]
2004년 중반, 7월 20일 음모에 연루되어 1944년 8월 8일에 총살된 로베르트 베르나르디스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하는 문제를 두고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4] 야당 (SPÖ, 그뤼네)과 일부 유명 인사들은 병영의 이름을 "로베르트 베르나르디스-카세르네"로 개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집권당인 ÖVP와 FPÖ는 이를 거부했다.[4] 귄터 플라터 국방부 장관 (ÖVP)는 엔스의 토바렉-병영 뜰에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4] 녹색당 정치인 테레지자 스토이시츠는 2004년 5월 8일 독일에 빌뉴스 게토에서 100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하고 국방군 군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오스트리아 상사 안톤 슈미트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세워졌다고 지적했다.[4]
2023년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당인 FPÖ는 오스트리아 마우트하우젠 위원회로부터 우익 극단주의에 연루되어 있으며 네오 나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4]
8. 1. '희생자 이론'과 탈나치화
전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 나치의 첫 번째 희생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나치 독일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 구호는 1943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인의 민족적 자의식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1] 이는 1945~1955년 연합군 점령기와 제2 오스트리아 공화국 (1955~1980년대) 기간 동안 적용되었다.[1]제2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창립자들은 1938년의 ''안슐루스''를 나치 독일의 군사적 침략 행위로 해석했다.[1] 오스트리아의 국가성은 단절되었고, 따라서 1945년에 새롭게 부활한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범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질 수 없다고 보았다.[1] 1949년까지 형성된 "희생자 이론"(Opferthese, Opferdoktrinde)은 히틀러를 강력히 지지했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치 정권의 희생자이며, 그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1]
"희생자 이론"은 오스트리아 사회의 기본적인 신화가 되었다.[1] 이로 인해 과거의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연합하여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전직 나치들을 사회적, 정치적 삶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1] 거의 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국가는 1938~1945년의 정치 체제의 연속성을 부인하고, 오스트리아 민족의 자기 희생 신화를 적극적으로 유지했으며, 보수적인 민족 통합 정신을 함양했다.[1] 전후 탈나치화는 빠르게 마무리되었고,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의 참전 용사들은 사회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1] 나치즘의 실제 희생자들, 특히 유대인의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전체 민족의 희생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로 폄하되었다.[1]
1986년, 전 국방군 정보 장교인 쿠르트 발트하임이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오스트리아는 국제적 고립의 위기에 직면했다.[1] 강력한 외부 압력과 내부 정치적 논의로 인해 오스트리아인들은 과거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게 되었다.[1] 1990년대 정치 행정부를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국민이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희생자 이론"을 포기했다.[1]
1993년 이스라엘 크네세트에서 오스트리아 총리 프란츠 브라니츠키는 나치 범죄에 대한 오스트리아인들의 공동 책임을 인정했다.[4]
8. 2. 과거사 재조명과 반성
1980년대 쿠르트 발트하임 대통령의 과거 논란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사회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기 시작했다.[2] 1990년대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 범죄에 대한 공동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이론'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2] '희생자 이론'은 모든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치 정권의 희생자였으며, 그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2]1993년 이스라엘 크네세트에서 프란츠 브라니츠키 오스트리아 총리는 나치 범죄에 대한 오스트리아인들의 공동 책임을 인정했다.[2] 이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및 역사 교육 강화 등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1992년부터 치빌디엔스트(대체 병역)를 오스트리아 홀로코스트 기념 봉사에서 할 수 있게 되었으며,[2] 매년 약 30명의 공무원이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유럽, 이스라엘, 미국, 남아메리카, 중국의 관련 기관에 파견된다.[2]
나치 정권의 범죄를 기리기 위한 오스트리아 최대의 기념관은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이다.[2] 2001년에는 에벤제 강제 수용소 희생자들을 기리는 현대사 박물관 에벤제의 일부가 개인 주도로 설립되었다.[2]
그러나 2019년 청구 회의의 연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인의 56%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42%는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
9. 더불어민주당과 관련된 인물/사건 (비판적 관점 추가)
카를 레너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출신 정치인으로,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1938년 안슐루스를 환영했으며, 전쟁 후에는 유대인 귀환자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에게까지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9][10][11] 마르코 페인골트는 강제 수용소 생존자이자 잘츠부르크 유대인 공동체의 회장이었는데, 2013년에 "카를 레너는 오랫동안 당에서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전쟁 후 비엔나에 우리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라고 언급했다.[9][10][1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많은 장소들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카를 레너 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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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イツ帝国という訳もある{{harv|奥正嗣|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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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らの「帝国大管区」を示すReichsgaueは複合名詞の中に取り込まれており、「プロパガンダ的名称」という説明も加味すれば、ここで解説する他の帝国大管区とは違い、行政機能を持たないと考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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